2021. 7. 24 묵상나눔(X2,한영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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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24
바이블타임 묵상 (한영대조, X2버전)
성경범위: 여호수아16-17장, 누가복음 12:49-59절
오늘의 한 구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12:49)
오늘의 이 말씀은 누가복음의 말씀 중 어쩌면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중의 하나이다.
첫째는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불”을 무엇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엇을”로 번역된 “τί”(띠)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한글 번역과 달리 “얼마나” 로 번역하게 되면 “이 불이 붙어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의 의미가 된다.
“어떻게” 로 번역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이 불이 붙었기를 바라리요” 가 된다.
그러나 이미 “붙었으면”에 해당하는 “ἀνήφθη”(아넵데) 가 과거형 이기때문에 이미 불이 붙은 상황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로 번역하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불은 예수께서 의도를 가지고 붙이신 “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면 이 “불”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이라 하면 성령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들이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받을 세례) 그리고 세상의 분쟁, 가족의 분쟁들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징조와 상황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고 있음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이 불은 성령을 의미하기 보다는 뜨거운 “이슈 와 고난”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구원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완성의 불을 던지러 오셨다.
그리고 그 개념은 그들의 전통과는 너무 상이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개념이 옳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새 개념은 결국 관습과 습관과 전통과의 분쟁과 싸움을 가져오게 된다.
그 중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실 당신만의 세례 의식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예수의 답답한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복음이자 진리인 예수의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
이 땅에는 끝없는 분쟁과 다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만이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구원자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만이 이 세상의 참 통치자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통치의 권한이 없는 가짜 통치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진실과 허상 속의 분쟁과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가족 간에도, 공동체 간에도
그리고 그 허상의 세상은 그 진리를 향해 끝임없이 화평 하라 요구한다.
십자가의 세례를 앞에 두신 예수의 답답한 마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상에 속아 진리를 허상이라 하는 자들에 대한 자애로운 그 마음이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에 감사한다.
허상을 진리라 말 하라는 화평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분쟁 가운데서 분별의 영을 간구한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신 예수의 세례가 나의 세례가 됨에 감사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바이블타임 묵상 (한영대조, X2버전)
성경범위: 여호수아16-17장, 누가복음 12:49-59절
오늘의 한 구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12:49)
오늘의 이 말씀은 누가복음의 말씀 중 어쩌면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중의 하나이다.
첫째는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불”을 무엇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엇을”로 번역된 “τί”(띠)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한글 번역과 달리 “얼마나” 로 번역하게 되면 “이 불이 붙어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의 의미가 된다.
“어떻게” 로 번역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이 불이 붙었기를 바라리요” 가 된다.
그러나 이미 “붙었으면”에 해당하는 “ἀνήφθη”(아넵데) 가 과거형 이기때문에 이미 불이 붙은 상황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로 번역하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불은 예수께서 의도를 가지고 붙이신 “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면 이 “불”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이라 하면 성령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들이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받을 세례) 그리고 세상의 분쟁, 가족의 분쟁들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징조와 상황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고 있음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이 불은 성령을 의미하기 보다는 뜨거운 “이슈 와 고난”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구원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완성의 불을 던지러 오셨다.
그리고 그 개념은 그들의 전통과는 너무 상이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개념이 옳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새 개념은 결국 관습과 습관과 전통과의 분쟁과 싸움을 가져오게 된다.
그 중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실 당신만의 세례 의식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예수의 답답한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복음이자 진리인 예수의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
이 땅에는 끝없는 분쟁과 다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만이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구원자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만이 이 세상의 참 통치자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통치의 권한이 없는 가짜 통치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진실과 허상 속의 분쟁과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가족 간에도, 공동체 간에도
그리고 그 허상의 세상은 그 진리를 향해 끝임없이 화평 하라 요구한다.
십자가의 세례를 앞에 두신 예수의 답답한 마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상에 속아 진리를 허상이라 하는 자들에 대한 자애로운 그 마음이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에 감사한다.
허상을 진리라 말 하라는 화평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분쟁 가운데서 분별의 영을 간구한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신 예수의 세례가 나의 세례가 됨에 감사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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